
[If] 150.
― 16. 09. 03. 21:30:00.
회색의 하늘이 낮게 가라앉는 오후였다. 급격히 떨어진 기온 탓에 옷깃을 모으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도 회색, 칙칙하게 늘어선 건물들도 회색. 온통 회색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가르던 발걸음 뒤로 가로등에 비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선다. 해가 지니 눈에 띄게 떨어지는 기온에 깊은숨을 내뱉어본다. 무엇 하나 거리낄 게 없다는 마냥 제 존재를 사방에 퍼뜨리던 폭염도 끝이 났다. 가을이다. 분명 가을이 오고 있었다.
― 16. 09. 03. 21:51:32.
날이 차다. 버스는 피로가 쌓여 낯에 그늘이 깔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은발의 남자도 사람들 틈에 섞여 담담히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근 일주일간 밀려든 일거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을 고려하면 간만의 이른 퇴근이었다. 피곤한 눈가를 꾹 누르며 옅은 숨을 내쉰다. 당장은 집에 가서 몸을 눕히고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상념을 멈추고 창가로 스치는 야경을 가만 바라본다. 검은 바탕에 흩뿌려진 노랗고 빨간 조명들이 스쳐 지나가다 금방 멈추어버린다. 막힌 길을 따라 느리게 꾸물대는 차들과 묵묵히 빛나며 제 할 일을 다 하는 가로등,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 평화롭기 그지없는 흔한 어느 날 서울의 야경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그 풍경에 어그러진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가볍지만은 않은 직함에 따라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단순히 직업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보이지 않는 골목 어딘가에서는 또 누군가가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차분히 눈을 감아버렸다. 지난 일을 잊어서도 안 됐지만, 쓸데없이 얽매여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 16. 09. 03. 22:14:48.
몇 개의 정류장을 더 지나고 나서야 버스를 떠나보냈다. 차분히 울리는 걸음 소리에 맞춰 풍경이 점점 변하더니 어느새 대로변의 소음도 골목의 어둠에 묻히며 금세 희미하게 사라져버린다. 시끄러운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그였기에 그런 고요함은 늘 익숙함과 편안함을 가져다주고는 했지만 때로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정확히는, 지난겨울 즈음부터. 급히 표정을 갈무리하며 생각을 접어둔다. 상념은 별로 좋은 것이 되어주지 못했다.
익숙한 길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시선이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밀집된 건물들 사이를 훑어보았다. 역시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떠올린다. 잔잔히 퍼지는 것이 늘 곁에 머물던 따스함에 대한 감사였을지, 주름진 손과 굽은 등에 대한 애련이었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무엇이었든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은 확실했다. 좋건 나쁘건 목석 같은 남자가 유난히 풀어지는 상대였다. 동시에 그가 유난히 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를 듣든, 좋게 말해서는 착실한 효자가 아니겠는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남자가 잠시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다. 저녁 식사 후에 먹을 과일이나 조금 챙겨갈 심산이었다.
― 16. 09. 03. 22:37:13.
사과 몇 개를 뒤적이는 손길이 마냥 익숙하지만은 않다. 고심 끝에 겨우 서너 개를 집어 들고 난 후에야 등을 돌린다. 아니, 금방 다시 돌아온다. 통찰이라도 하듯 한참 사과를 쏘아보더니 두어 개를 더 챙기고야 만다. 불량하게 생긴 남자 둘이 문득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나. 끝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굴레에서 벗어난 그들은, 글쎄, 완전하게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음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자연스럽게 그의 집에 들락거리는 횟수도 늘어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조합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그도 종일 홀로 빈 집을 지키던 어머니의 적적한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자 조금씩 잔소리를 줄여내었다. 가끔 튀어나오는 거친 언행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참이었고, 이제는 무심히 넘기거나 자제시킬 줄도 알았다. 어찌 되었든 둘의 존재가 일상에 꽤 크게 녹아내린 건 사실이었다. 또 며칠 이내로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들어와 앉아있을 테니 혹시 모를 손님맞이를 미리 대비해두는 것도 좋겠지.
― 16. 09. 03. 22:41:44.
“…아, 뭐! 표정이 왜 그래?”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어색하게 머리만 매만지는 키 큰 남자와 평소보다 괜히 더 툴툴거리는 작은 남자는 저도 모르게 굳어진 은발의 남자를 보고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주위만 맴돌았다. 왜 왔냐는 물음에 아예 시선을 돌려버리는 김주황과 애써 말을 돌리며 들고 있던 봉투마저 빼앗아 당당하게 앞장을 서는 허건오가 오늘따라 확연히 이상하다. 무슨 말을 해도 주황은 답이 없고, 건오는 웃기만 하고. 조용하던 골목이 실없는 소리로 가득 찬다. 그럴수록 남자는 답답해질 뿐이었다.
“제가 화라도 냈습니까? 어쩐 일로 오셨는지 물었을 뿐입니다.”
“거, 우리 사이에! 예고 없이 짠, 나타날 수도 있지! 그 뭐야, 그거. 서프레아!”
“서프라이즈, 말씀이십니까.”
“아, 그거나, 그거나!”
“주황 씨는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왜….”
“어? 뭐? 나? 하, 내가 아프긴. 그럼. 안 아프지. 어, 아닌데. 형씨 얼굴이 더 하얗다?”
대체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지지를 않는다. 반쯤 포기한 태성이 마저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손잡이를 잡아보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의 손에 활짝 열린 뒤였다.
“할머니, 우리 왔어!”
집주인이라도 된 양 당당하게 제일 먼저 들어가는 건오의 뒤로 그런 건오를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태성이 따라 들어갔고, 아직도 반쯤 굳어있는 주황이 문을 닫았다.
― 16. 09. 03. 23:12:58.
모자의 짧은 재회를 방해하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지 종알거리며 방에 들어선 건오가 벌렁 바닥에 드러눕자 옆에 주황이 뻣뻣하게 앉는다. 먹을 걸 더 내오겠다는 어머니를 만류하려다 실패한 태성까지 그 앞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다 말았다.
“…왜 잔이 세 개가 나와 있습니까?”
순간 싸하게 굳어지는 공기에 태성이 미간을 좁힌다. 곧 더욱 커진 건오의 음성이 횡설수설 터져 나온다.
“아, 하! 할머니가 우리 올 거 딱 알고 준비하셨나 봐! 이야! 우리 할머니가 최고야. 그치, 고릴라?”
목석처럼 앉아있는 주황을 퍽퍽 쳐대는 건오의 불안한 시선이 사방을 굴러다니는 걸 본 태성이 한숨을 쉬었다.
“언제는 저 없을 때 드나든 적 없으셨습니까? 왜 밖에서 우연히 만난 척을 하십니까. 안에서 기다리셔도 됐을 텐데.”
시선을 마주하지 못 하는 두 남자가 얼른 각각 바닥과 천장을 관찰한다. 황당할 수밖에. 결국 셋 모두 말을 잃은 지 한참 만에 주황 덕분에 침묵이 깨졌다.
“거, 잠깐 들렀다가 우리는 형씨 데리러 다시 나왔지.”
“저를요?”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
다시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는다. 스물아홉의 건장한 현직 경찰을 위해 밤길 마중을 나온 험상궂은 인상의 스물아홉 전직 용역업체 실장과 성질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물일곱의 전직 용역업체 직원이 고마워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어야 했을까. 건오의 매서운 눈총을 애써 모른 체하던 주황이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재분을 얼른 부축하자 냅다 일어난 건오가 쟁반을 대신 들고 상에 내려놓는다. 덕분에 할 일이 없어진 태성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앉히는 수밖에 없었다.
― 16. 09. 03. 23:47:23.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는 그 후로도 한참 계속되었다. 인자하게 웃으며 안부를 묻는 재분에게 애써 웃으며 답을 하다가도 태성과 눈이 마주치면 곧바로 굳어버리기를 수차례 반복하니 인내심도 슬슬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세 남자를 웃게 하던 재분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분위기는 곧바로 추락해버렸다.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둘의 모습에 답답해진 태성이 짧은 한숨을 뱉자마자 긴장한 두 남자가 바싹 움츠러든다.
“…여긴 취조실이 아닙니다.”
결국 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단어 선택에 약간의 오류가 있었는지 오히려 자세마저 바르게 하고 앉아버린다. 태성이 다시 긴 한숨을 뱉으며 미간을 문지른다.
“대체 오늘따라 두 분 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이유를 물어도 대답은 없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딱딱한 말투에 직업병까지 더해지자 분위기는 정말로 취조실의 그것과 같아졌고, 영문을 모르겠는 태성의 답답함만 커지고 말았다.
“뭐, 평소랑 똑같은데 왜 그래. 형씨가 너무 예민… 한 것 아니고?”
애써 침묵을 깨본 주황의 말투도 어째 서먹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건오의 시선은 여전히 천장에 향해있다. 분명 무슨 잘못을 해서 제가 곤란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결론 내린 태성은 포차에서 외상을 제 이름을 두고 달았다거나 경찰서 근처에서 제 이름을 부르짖으며 난동을 피운 건 아닐까 하는 온갖 가설을 세우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지는 표정을 보며 두 남자도 함께 더욱 굳어버렸다.
― 16. 09. 03. 23:54:39.
“우리가 무슨 어린애냐! 대장 나리가 뒷바라지해주고 다니게!”
버럭 소리를 지른 건오의 뒤에서 주황도 조용히 동의를 표한다.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꺼내본 말이었건만, 단숨에 묵살 당해버리자 태성이 눈썹을 찌푸린다. 그 모습에 합, 입을 다물었던 건오가 작은 소리로 꿍얼거리는 것을 뒤로 한 남은 둘만이 대화를 이었다.
“전처럼 더러운 일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언제 형씨한테 피해를 줬다고 그래?”
“…오해였습니다. 사과드리죠. 종일 저만 모르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혹시나 했습니다.”
“아니, 뭐, 누가 들으면 우리가 형씨 따돌리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뭐, 숨기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
과장되게 팔을 흔들어대는 그 모습이 수상합니다, 라고 말하려던 걸 꾹 참아낸다. 잠시 혼자 뒤편으로 밀려났던 허건오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니, 대장 나리 설마 우리가 왜 왔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
“말씀을 안 해주시는데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몰라주면 우리야 고마운데! 혹시 바보야? 진짜 몰라?”
“애송이, 조용히 안 해? 오늘은 참으라고 했잖아!”
“씨, 답답한 걸 어쩌라고! 난 이런 거 정말, 정말 엄청 싫어한다고!”
어느새 또 투닥거리기 시작한 둘의 모습을 태성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뜬금없이 찾아와 알 수 없는 소리만을 해대니 끼어들 틈이 없었다. 물론, 살벌하게 서로를 노려보는 둘의 사이에 굳이 끼고 싶지도 않았다. 한창 으르렁대던 건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표적을 바꾼다.
“아, 오늘 같은 날에는 그냥 모른 척 잘 넘어가 주면 안 돼?”
“대체 뭘 넘어가 달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와! 나 때려치면 안 돼? 답답해 죽어!”
“먼저 하자고 한 게 누군데. 입 다물라니까!”
금방 다시 시끄러워진다. 참다못한 태성이 허건오 씨, 단호히 그를 부르자 움찔 말을 멈추고는 투덜대며 얌전히 앉는다.
“두 분이 뭘 원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필요한 일이라면 적어도 저와 상의 정도는 한 후에 말씀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무 말도 없이 계시면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름 차분하게 타이르려 한 말이었는데 어째 역효과가 나온 것 같다. 누가 봐도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인 건오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튼다. 부들부들 떠는 걸 알아챈 주황이 헛기침을 하며 적당히 중재를 시도하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듯했다.
“…아이씨, 못 참아!”
결국 벌떡 일어나버린다. 놀란 태성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덩달아 급하게 몸을 일으킨 주황이 말리기도 전에 쿵쾅거리며 방구석에 어설프게 숨겨둔 케이크를 집어든 건오가 망설임 하나 없이 그대로 크림 한 덩이를 태성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애송이, 10초만 참아보지 그랬냐. 망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보던 주황의 중얼거림도 무시한 채 식식대던 건오가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버럭 내지른다.
― 16. 09. 03. 23:59:57.
“생일, 축하한다고. 하태성 대장 나리!”
― 16. 09. 04. 00:00:00.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지만 아주 조금 특별한 하루가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