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성]가을 장마
W.소음(@mist_of_soeum)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태성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껴 그를 견디다 못한 차가운 빗방울이 슬로우 모션처럼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태성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슬쩍 목례를 해 보이곤 투명한 우산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천 원입니다. 태성은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건내고 수고하십시오. 라는 말과 목례를 하고는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등 뒤의 아르바이트생은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만지기 시작했다. 태성은 편의점의 문을 열고 투명우산을 펼쳐들었다. 우산에 맺히는 빗방울 사이로 회색의 하늘이 모였다. 태성은 그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할 일을 생각해내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태성은 잘 나오지도 않는 종이 신문 여러 부를 샀다. 신문사만 다를 뿐, 내용은 엇비슷한 이야기였다. 헤드라인에는 백석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즐비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문득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9월 4일. 분명 제 생일인 날이었지만, 저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날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었다. 태성은 다시금 허무감을 느꼈다. 어머니와 그들이 그리웠다. 잠시 투명한 우산으로 비가 내리던 하늘을 보던 그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회색으로 흐린 하늘은 아직도 더 쏟아낼 기운이 넘치는 것인지 우르릉 우르릉 울리고 있었다.
태성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낯익은 길이 보였다. 그의 집. 아릿하게 퍼지는 조각난 기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대하라고- 하는 들뜬 목소리가 머릿 속이 웅웅거렸다. 태성은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골목에서 나왔다. 잊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기억 해 내려 하면 깨질듯 아파오는 머리에 기억 해 내기도 쉽지 않았다. 태성은 골목길을 굳이 뒤 돌아보지 않았다.
태성은 어느새 한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씁쓸함이 어깨를 짓눌렀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은 저를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것으로 보였다. 총성이 울리는 듯한 느낌. 갈 길 잃은 강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또 다시 저를 삼킬 것 같은 느낌에 하태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우산을 꾹 쥐었다. 투명한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게 떨어졌다. 바짓단에 스며드는 빗방울을 대충 털어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한 태성은 자신의 집 근처에 도달했다. 어쩐지 막막한 기분에 동네의 슈퍼마켓에 들어가 평소에는 마시지도 않는 캔 맥주 하나를 구입했다. 어깨에 우산을 걸쳐두고 계단 난간에 서서 캔을 따 한 모금 한 모금 들이켰다. 오랫동안 침입을 허하지 않았던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뜨겁게 느껴졌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눈을 떠 계단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그 날도 이렇게 비가 퍼부었던가. 흐릿하게 맴도는 아득함을 뒤로 하고 태성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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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이 왔니?”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인자하게 웃으며 저를 반기는 어머니의 모습에 태성은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에구, 우리 태성이 옷도 다 젖었네. 감기 걸릴라. 어서 들어오렴. 걱정 하시는 어머니에 태성은 괜찮아요 어머니. 하고 웃어보였다.
“어, 뭐야 왔어 대장나리? 들어 올거면 빨리 들어 와.”
“허... 건오 씨...? 여긴 어쩐 일로...?”
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건오의 모습에 태성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내가 못 올 곳 왔나?”
“우리가 말 없이 오긴 했잖냐 애송이.”
“씨이... 애송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고.”
건오의 뒤로 보이는 주황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살벌하게 투닥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태성은 픽- 하는 웃음을 흘렸다. 어, 웃었다. 그래, 그렇게 좀 웃고 다니라고 대장나리. 주황과 싸우던 건오는 태성의 작은 웃음소리에 싸우던 것을 멈추고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가 질투 날 만큼 웃으며 살아. 건오의 말에 동의하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허건오 씨. 김주황 씨. 그런 말 하기 전에 좀 더 웃다가지 그러셨습니까. 태성은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
“어쩔 수 없지 뭐. 아, 이제 갈 때 됐나보네. 잠시 왔던 거라 이만 가봐야해. 이 애송이랑 어머님 잘 모시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라. 어이, 애송이. 갈 준비 안 하냐?”
“아- 진짜 끝까지 애송이라 하네? 대장나리, 너무 빨리 오면 내가 죽여버린다? 올거면 꼬부랑 할아범 되고나서 오던가.”
두 사람은 다시 투닥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태성아. 태성은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태성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태성이. 흐릿하게 번져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대장나리 생일이였어?
모르고 왔냐 애송이?
형씨도 알고 있었어?와, 이거 배신감 드네.
웅웅 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사그라들어갔다. 어머니도, 허건오 씨도, 김주황 씨도 천천히 사라져갔다. 태성은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끌어져 내렸다. 미소 사이로 눈물이 차올랐다. 마지막으로 귓가에 잔잔한 울림이 남았다.
생일 축하해.
빗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